
작가: 크리스틴 이브
펜: 에테리얼 잉크
퍼블리싱 하우스: 크리스틴 이브 퍼블리싱 하우스
IEU: 8.7
Ravel.7.6
릴리의 투명한 책장의 기록
펼쳐지는 페이지 중 한 페이지를 내 앞으로 가져와 크게 펼쳐본다. 마치 큰 영화관의 스크린에서 진행되는 장면을 보듯이.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남자가 앉아있는 의자의 앞에는 여러 종이가 붙어있는 벽이 있다. 남자는 무슨 문제를 풀고 있는 것 같았다. 꽤나 어려운 문제를 생각하느라 피곤한 듯 뒷머리를 쓸어 올리며 의자에 몸을 기댄다.
또 한 장면이 펼쳐진다. 장작더미에서 타오르는 불 위에 벽에 붙어 있던 종이들을 날리며 어려운 문제를 다 푼 듯 해방감에 동료들과 기쁜 듯 환하게 웃고 있다.
또 어느 한 장면에서는 맑은 하늘아래 거대한 신전의 기둥에 써져 있는 문자를 손가락으로 쓸어보고 있다. 이전에 봤던 남자와는 다른 시대의 남자 같았다. 옛날 옷을 입은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는 근엄한 얼굴로 무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기둥에 써져 있는 글자가 보인다. ‘Know thyself’ 누군가 뒤에서 그 나이 많은 남자를 부르는 듯 남자는 뒤를 돌아본다.
나와 눈이 마주친 것일까?
하지만 그건 아닌 듯하다.
나는 다락방에서 그 남자가 나오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 남자가 나를 볼 수는 없었다. 분명히 그런데.. 이 느낌은 뭘까.. 분명 눈이 마주친 것 같았는데.. 또다시 장면이 넘어간다.
이번에는 비행기에 타고 있는 남자다. 남자는 어떠한 목적 때문에 옆 자리의 여자를 협박하고 있다. 이번에는 빠르게 페이지가 넘어간다. 방금 보았던 남자의 얼굴이다. 입에는 시가를 물고 조금 더 나이가 많이 들고 야윈 얼굴에 양복을 입고 있다. 그 남자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다.
또다시 장면이 넘어가 이번에는 아주 화려하고 커다란 목욕탕에 그 남자가 걸어가고 있다. 남자의 다리가 화면에 비춘다. 탕에 들어가 얼굴과 상체만 보이는 남자는 양팔을 목욕탕의 벽에 기대고 표정 없는 얼굴로 잠시 시간을 보낸다. 장면은 목욕탕의 전체를 비추며 지나간다. 화려한 금색으로 가득한, 작은 폭포 같은 물들이 양쪽 벽면에서 떨어지지만 바닥에 닿지는 않고 사라지고 있다.
남자는 검은색 고급 소재로 된 가운을 걸친 남자가 복도를 지나 커다란 서재로 들어선다. 서재 가운데에 있는 책상 앞에 앉아 오래된 타자기에 쓰다만 원고를 작성한다. 그 남자가 있는 서재에 누군가 드레스의 끝자락을 흩날리며 살며시 들어온다. 긴 머리를 늘어트리곤 남자와 같은 검은색 가운이 길게 늘어져 마치 드레스처럼 보이는 옷을 입고는 서재의 어떤 한 권의 책을 꺼내 들고는 마음에 드는 듯 남자가 앉아있던 책상에 가져다 놓는다. 하지만 그새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는다. 오래된 타자기도 보이질 않는다. 여지는 타자기가 있던 자리에 책을 두고는 남자처럼 이내 사라진다.
책상 뒤 창문의 커튼이 흔들릴 뿐이었다.
창문에 밝게 비추는 달이 수상하다.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누군가 달을 손으로 집자 다이아몬드로 변해 달을 집은 누군가의 목에 목걸이처럼 걸려있다. 얼굴은 보이질 않지만 방금 그 여자다.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그 여자 밖에 없다고 직감했기 때문이다.
페이지는 계속 넘어가다가 어느 아름다운 건축물의 정원에 있는 사과나무를 보고 있는 한 남자가 보인다. 나는 문득 저 장면으로 넘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방금 전 보았던 여자처럼 사과나무의 사과를 손으로 집어보려 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사과는 떨어졌고 사과나무를 바라보던 남자의 눈에 떨어지는 사과가 비춘다. 시간은 조금 지난 듯 같은 정원에 이번에는 휠체어를 탄 소년이 보인다. 하지만 조금 다른 점은 어느 영화의 촬영장으로 쓰고 있는 듯했다. 안경을 쓴 남자 배우의 눈이 잊히질 않는다. 휠체어를 탄 남자 배우가 나오는 다른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때에는 영국의 마법사 역할을 맡았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그 영화를 어디서 본 것일까?
페이지는 내 생각을 기다려주지 않고 그새 또 다른 장면으로 넘어간다. 릴리를 닮은 빨간 망토를 쓴 어린아이가 보인다. 내가 페이지를 보는 것처럼 그 아이는 우주 공간 위에 커다란 필름처럼 늘어진 영화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장면이 마치 주마등처럼 보이기도 했다. 빨간 망토를 뒤집어쓴 아이의 얼굴은 보이지가 않았다. 아이의 망토 속 그림자에 스크린 속 장면이 비추고 있었을 뿐이었다. 내가 보았던 투명한 책장의 기록들 중 아름다운 정원의 사과나무와 함께 계단에서 넘어지는 남자 배우를 보고 있다.
우주선만큼 커다란 검은 종이비행기를 타고 있는 아이는 종이비행기의 날개에 손을 뻗자 물처럼 흐르는 날개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 들더니 무엇인가를 적어놓고는 어딘가로 날아간다.
이번에는 주황 망토를 쓴 여자아이가 내가 보았던 기둥에 무엇인가를 쓰고 있다. 아이의 뒤로 밝게 빛나는 청량한 해변과 아이가 타고 온 듯 한 호박 모양의 배가 정박해 있다. 내가 보았던 나이 많은 남자가 보던 문자는 저 아이가 쓴 것일까?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히 무엇인가를 썼지만, 문자는 보이질 않는다.
잉크가 다 떨어진 것일까?
생각을 미처 다 하기도 전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내 화면이 주변을 함께 비추자 노란색 망토를 뒤집어쓴 아이가 검은 랜턴이 달린 노란색 열기구에 탄 채로 커다란 검은 구체 앞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 아이는 이내 손을 뻗어 랜턴에 검은 불꽃을 피우더니 열기구는 빨려가듯 검은 구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무거운 질감의 바람이 화면에 바람 불듯 일렁이더니 어디선가 커다란 나뭇잎을 탄 초록색 망토를 뒤집어쓴 아이가 작은 시계가 달린 아이의 키보다 살짝 큰 펜으로 무엇인가를 쓰면서 날아다니고 있었다. 시계는 세 가지 작은 시계가 겹쳐있었고 시계를 감싸고 있는 빛나는 글자들이 아이가 펜을 휘두를 때마다 초록색 잉크가 되어 쏟아졌고 무엇인가를 적고 있는 듯했다.
한 참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장면이 바뀌고 파란색 망토를 쓴 아이가 비눗방울에 탄 채 지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강들의 줄기가 마음에 드는 듯 넋을 놓고 바라보더니 이내 무엇인가를 다짐한 듯 보였다. 그 아이는 떠나기 전 얇은 종이처럼 생긴 스크린을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보는 페이지와 같은 것처럼 보였다. 파랑 망토를 쓴 아이는 그 페이지에 무언가를 적고는 사라졌다.
나도 그 아이들처럼 펜을 찾아보았지만 다락방에는 펜은 없었고 릴리가 쓰던 펜 역시 릴리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졌다. 아마도 릴리가 가져간 듯하다. 그 와중에도 펜은 챙겨간 것을 보면 릴리에게 아주 소중한 것 인 듯하다.
그때였다.
페이지 속 장면들에 심취해 있었던 나의 집중력을 흩뜨려 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책장이 흔들리더니 여러 권의 책이 떨어진 것이었다. 제목은 벨라의 할로윈 레드, 벨라의 할로윈 오렌지, 벨라의 할로윈 옐로우, 벨라의 할로윈 그린, 벨리의 할로윈 블루라고 쓰인 책들이었다. 나는 서둘러 그 책들을 다 읽어냈고 아직 보지 못할 할로윈 시리즈가 더 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투명한 책장은 나에게 친절하지 않는 듯 더 이상의 페이지가 나오질 않았다.
나는 책을 읽기를 간절히 원했고 릴리의 소식을 적은 아직 펼쳐보지 않은 종이비행기들을 펼쳐볼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릴리의 행방을 뒤쫓을 생각 따위도 잊은 채, 그저 책장의 책을 뒤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한 참을 책장을 뒤적거리던 나는 방금 책들이 떨어진 자리의 구석에서 커다란 깃털이 달린 검은색 펜 하나를 발견하였고, 펜을 집어 들어 나머지 할로윈 시리즈를 직접 써보기로 했다. 제목은 이전의 시리즈를 따라서 벨라의 할로윈 네이비, 벨라의 할로윈 퍼플, 벨라의 할로윈 그레이, 벨라의 할로윈 블랙이었다.
책의 제목을 적어내자 펜은 스스로 움직이듯 제목에 걸맞은 이야기들을 적어내었다. 때문에 나는 손쉽게 책을 쓸 수 있었고 서둘러 그 책들을 읽어보았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투명한 책장에 릴리의 감정들이 기록되던 것처럼 나의 감정 또한 기록이 되는 듯했다.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종이비행기를 펼치자 이야기는 다시 진행되었다.
네이비색 망토를 뒤집어쓴 여자아이는 철로 된 둥근 구체에 타고 있었는데 이전의 아이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둥근 조형물의 갈라진 틈으로 풍경을 바라보던 아이는 나를 눈치챘든 이쪽을 한 번 바라보았고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내가 그들을 보듯 그들도 나를 보고 있는 것일까?
순간 빛나는 보라색 배경의 아름다운 연기 속에서 보라색 망토를 입고 있는 여자아이가 솜사탕 구름을 타고 등장하였는데 그 아이는 긴 검은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었다. 내가 망토를 뒤집어쓴 아이들의 얼굴이 보고 싶었기 때문에 벨라의 할로윈 퍼플을 쓸 때에는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었다’라는 문장은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지나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별들과 보라색으로 공허한 검은색 우주가 색칠되고 있었다.
이어서 회색 망토를 쓴 아이가 영롱하게 빛나는 투명한 나비 브로치를 망토에 단 채, 자신의 키보다 큰 낫을 들고는 뛰어가는데 낫으로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낫의 손잡이 끝에 펜촉이 있는 걸로 보아 저 아이의 펜 인듯하다. 나조차도 생각이 못한 부분은 아무래도 펜이 디테일을 살려 함께 적어내고 있는 듯하다.
검은색 망토를 뒤집어쓴 아이는 등장하지 않은 채 종이비행기의 장면이 끝나고 말았다.
당연하다.
내가 펜으로 망토를 그려내어 입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투명한 책장 속 어디론가, 펜이 이끄는 대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릴리가 사라졌던 것처럼. 파란 망토를 쓴 아이가 내가 보던 페이지와 같은 페이지들을 가지고 있었음을 기억하고 혹시 복사된 페이지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검은 망토와 함께 그려낸 페이지들을 여러 장 쥐고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세계로 넘어가려 한다.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락방에 쪽지 하나를 남겨두고는 책장 속으로 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