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 크리스틴 이브
펜: 에테리얼 잉크
퍼블리싱 하우스: 크리스틴 이브 퍼블리싱 하우스
IEU: 8.7
Ravel.7.6
릴리의 다락방
릴리의 다락방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멈춰 있었습니다. 릴리가 시간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락방의 작은 창문을 통해 정원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조용한 다락방에서 릴리는 자신의 숨소리만 들을 수 있었고, 다락방의 고요함을 바라보았습니다. 정원에서는 자주 똑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지나갔습니다. 그때까지 릴리는 아무런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평소처럼 일상을 보냈습니다. 릴리는 주로 종이비행기를 접어 정원 밖으로 날리곤 했습니다. 릴리가 종이비행기를 날리면 창문 앞에서 사라지곤 했는데, 곧 정원 밖에 나타나 날아다녔습니다.
어느 비 오는 날, 릴리는 정원 울타리 밖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에 그동안의 시간이 쏟아져 흘러갈 듯한 표정의 작은 고양이를 발견했습니다. 릴리는 한동안 고양이를 바라보다가 책을 집어 들고 침대에 앉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비에 젖은 털과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정원 울타리 밖에 있던 작은 고양이를 바라보던 릴리의 기억은 그녀가 책을 고르던 책장 바로 옆에 숨겨진 투명한 책장에 기록되고 있었습니다. 릴리가 숨겨진 책장을 발견하고 그날의 기록을 읽게 되는 날은 아직 멀었습니다.
어느 날, 릴리는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호기심에 창문을 열고 듣고 싶었지만, 소심한 릴리는 창문을 열지 않고 더 가까이 다가가서 목소리를 더 잘 들으려 했습니다. 소리는 희미하고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한 문장은 분명히 들렸습니다.
“몇 살이니?”
시간이 흐르지 않는 다락방에서 릴리가 처음으로 종이비행기에 시간을 나타낼 수 있는 단어를 적은 날이었습니다. 시간이라는 단어가 릴리의 다락방에 기록된 후, 릴리는 시간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릴리의 다락방에도 시간이 생겨났습니다.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릴리는 하나의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창문 밖에서 그녀의 나이를 물었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요?
호기심을 참지 못한 릴리는 창문 곁에 귀를 대고 그 목소리가 다시 들리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요. 릴리는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목소리를 듣기 전에는 단순히 다락방에 가만히 있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었는데, 목소리를 듣고 난 이후 감정의 변화를 경험한 후, 그녀는 그 상황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고통스러웠습니다. 예전에는 단순했던 일들이 이제는 매 순간이 흐르고, 매 초가 똑딱이는 것을 느끼면서 고문과도 같아졌습니다.
매일 아침, 다시 그 목소리를 들을 희망으로 일어났지만, 결국 잠들 때까지 실망만 할 뿐이었습니다. 실망의 나날들이 계속되면서 느껴지는 고통은 릴리가 다시는 눈을 뜨지 않겠다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만들었습니다. 시간의 무자비한 흐름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깨어났을 때, 릴리는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오래 잠을 자더라도 눈을 뜨는 순간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으며, 눈을 감기 전의 시간은 한순간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넌 누굴까? 왜 나를 부르는 거니? 소리가 들려’
나를 부르고 있어. 하지만 릴리는 내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걸. 릴리가 듣는 소리는 무슨 소리인 걸까? 난 들을 수 없어.
‘잠에서 깨고 싶어. 내 소리와 같은걸.’
떨림. 릴리는 떨고 있어.
‘말하기가 무서워. 아무리 멀리 있어도 나는 널 알아차릴 수 있어’
내 모습이 변해도 알아차리는 릴리. 내가 어떤 상태든 ,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
‘난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거든.’
“…..”
그 말은 내가 죽을 수 없다는 말이야.
“…..”
‘그럼 나는 살아있는 건가? 네가 누구인지 궁금해. 너를 만나러 가야겠어.’
릴리는 나를 만나러 온다면서 어딘가로 사라졌지만, 다락방 창문은 여전히 단단히 닫혀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이자 릴리를 내려다보는 존재로, 릴리의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지만 릴리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해.
나를 만나러 오겠다니.. 사실은 나도 릴리가 나를 찾으러 와주었으면 해. 그렇지만 그건 너무나 어려운 일인걸..릴리는 앞으로 나에게 늘 거짓말을 하게 될 거야. 왜냐하면 릴리는 내가 있는 여기까지 올 수가 없기 때문이야.
릴리의 다락방은 아주 넓어서 릴리가 모든 곳을 가볼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 왜냐하면, 릴리의 다락방에 있는 것은 커다랗고 편안한 침대와 책장에 릴리가 읽을 책들이 가득 쌓여있을 뿐이야. 그리고 단면으로 인쇄된 책의 페이지를 찢어 빈 페이지에 가끔씩 글을 적어 창밖으로 던질 뿐이야. 릴리는 누군가가 읽어줬으면 하는지, 누군가에게 보낸 건지 자신도 잘 모르고 있어. 책장 옆의 투명한 책장으로 사라진 릴리는 지금 책장 속 어느 책에 들어가 있는지 나조차도 모르겠어. 하지만 릴리가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지 릴리가 사라진 후, 빈 다락방에 이따금씩 종이비행기가 날아오면 종이비행기에 적힌 글로 릴리의 근황을 알 수 있어.
최근에 릴리가 보낸 종이비행기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친구를 만났어. 은하수를 담은 망토를 길게 늘어뜨린 호박 유령 친구야.’
… 기시감이 느껴진다.
릴리가 다락방에 같은 내용의 종이비행기를 날린 적이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하지만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봐도 같은 내용의 종이비행기는 날아온 적이 없는데, 이전의 종이비행기를 펼쳐 봐야겠다. 이건 처음에 릴리가 날린 종이비행기의 내용이다.
-‘파란 우산’
릴리는 뭘 말하고 싶었던 걸까?
릴리가 사라진 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나조차도 알 수 없다. 그저 릴리의 책장 옆에 있는 투명한 책장의 기록을 읽을지 고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종이비행기는 한 번 펼치면 투명한 책장에 내용이 기록되는 듯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한 번도 투명한 책장의 기록을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나에게도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 걸까? 그것은 릴리의 근황과 관련이 있는 걸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투명한 책장 속의 기록들은 릴리의 잃어버린 시간들을 담고 있었다. 그곳에는 릴리가 날린 종이비행기와 그녀의 잊혀진 기억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나는 그 기록들을 읽는 것이 두렵다.
릴리가 사라지기 전 경험했던 감정들을 알고 싶지가 않다.
괴로워하던 릴리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은 책장의 모든 책을 읽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해답을 찾을 수가 없다. 아마도 책장의 책에 적혀있지 않은 잃어버린 페이지의 기록은 투명한 책장에 함께 기록되어 있는 듯하다. 내가 책장의 책을 읽는 동안 종이비행기는 쌓여갔고 잃지 않은 릴리의 소식이 다락방을 가득 채울 만큼 쌓여있었다. 쌓인 종이비행기 중 하나를 펼쳐 보기 시작했다. 이전처럼 글이 아닌 영화의 한 장면을 접은 듯 한 종이비행기로 릴리가 보는 장면들을 보기 시작했다. 릴리는 많은 친구들을 만나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릴리가 보내주는 종이비행기를 통해서 릴리가 보는 것들을 나도 볼 수가 있었다.
마치 영화처럼 펼쳐지는 장면들은 소리 없는 채로 내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릴리는 투명한 책장 속에서 꿈을 꾸는 것일까? 그렇다면 릴리가 꾸는 꿈은 전부 환상일까? 이렇게 생생한데.. 소리가 듣고 싶었던 나는 릴리의 책장에서 읽은 책들의 텍스트들을 적절히 사용해 릴리의 꿈의 조각에 스스로 소리를 입혀본다. 그리곤 간절히 바래본다. 릴리가 보는 장면들이 꿈이 아니길.. 꿈이라면 사실이 되길 원하다가도 불가능할 것 같은 생각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또 시간이 흐른다.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릴리가 사라지기 전에도, 사라지고 난 후에도 어떻게 종이비행기를 날릴 수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이비행기가 어떻게 다락방에서 사라진 후 다시 창문 밖 정원으로 날아갈 수 있는지를 알아봐야겠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혹시 이곳에 나와 릴리 말고도 다른 존재가 있었던 것이 아닌지 알아봐야겠다. 한 번 읽은 릴리의 책장도 다시 읽어봐야겠다. 몇 번에 걸쳐서라도, 반드시, 알아야겠어! 알고 싶어졌다. 내가 투명한 책장을 읽을 수 있을 때가 언제일지 알고 싶어졌어..생각을 마치고 숨을 고르니, 종이비행기에 적힌 내용과 투명한 책장의 기록이 미세하게 다를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책장의 책을 읽는 순서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하다.
책을 읽는 순서가 있다!
그때였다.
시간이 소리와 함께 다락방으로 들어오기 전 릴리가 생각이 났다. 투명한 책장의 기록은 책장의 책을 읽는 순서를 정해준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릴리가 느꼈던 감정이 투명한 책장에 기록이 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릴리의 감정이 시간이 멈춰있었던 다락방에서 시간 관계에 상관없이 기록이 된다는 것, 그리고 책장의 책을 투명한 책장의 기록에 맞추어 읽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시간을 제외하고 릴리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목소리가 들리기 전에는 항상 책을 읽고 있었던 릴리를 떠올리며 릴리가 처음 읽었던 책이 무엇인지 떠올렸다.
책장 앞으로가 릴리가 보던 책과 같은 책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책의 제목이 생각이 나질 않아 곤란하던 차였는데, 문득 책의 표지가 생각이 나서 같은 표지의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의 제목은 ‘멘토 프로테제 출판의 비밀: 시간이 얼어붙은 공간에서 망각의 마지막 말’이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한참을 이 책을 읽어보는데 나의 시간을 쏟아부었다. 그러곤 릴리가 투명한 책장 속 어떤 책 속의 어느 장면을 여행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릴리가 사라진 후 날아온 종이비행기에는 호박 유령 친구를 만났다고 쓰여있었다. 그 이후에는 글자가 아닌 장면으로 전해져 왔었다.
나는 이 책에 쓰인 내용에서 릴리가 보내온 장면이 어느 시점인지 찾아보았지만, 여전히 찾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이미 한 번 펼쳐진, 장면을 접어 날린 종이비행기는 사라지고 릴리의 감정만이 투명한 책장에 기록되어 찾아볼 수가 없었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릴리가 더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는 그 당시의 나의 생각만 기억날 뿐이었다. 그리곤 알았다. 아무래도 이건 나의 절망이 될 듯하다. 기억은 나질 않지만 투명한 책장의 느낌으로 때려 맞출 수밖에 없었다. 가장 강한 떨림이 느껴지지만 여전히 아주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는 투명한 기록을 손에 붙잡고 틀릴까 불안해했다. 책은 아주 복잡해서 한 번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페이지 속의 미로를 탐험하는 듯한 이 기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릴리는 마음껏 여행을 하는 동안 스스로도 모른 채 흔적을 종이비행기로 날려 보내는 듯하다. 나는 아직 펼치지 않고 쌓아둔 종이비행기를 펼쳐 보았다. 종이비행기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많은 친구들을 만났어’
이번 종이비행기는 글로 적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또 한 번 절망했다. 이 책에는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는 장면이 너무나도 많이 쓰였기 때문에 특정한 장면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 수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이전에 다른 종이비행기를 보고 했던 생각과 같다는 것.
-‘많은 친구들을 만났어’
책에 기록된 것과 릴리의 종이비행기를 통해서 특정 시점을 찾아보았다. 릴리가 만난 호박 유령은 이 책에 나오질 않는다. 그렇다면 다른 단서,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는 장면 중 한 군데를 따라가 봐야겠다. 마음의 방향을 정하고 투명한 책장을 다시 바라보니 흔들리는 한 권의 책이 느껴진다. 그동안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점점 선명해지더니 투명한 책장에서 떠올라 페이지의 장면들이 마구 넘겨진다. 눈 앞의 페이지는 릴리가 처음으로 읽던 책의 한 페이지임을 직감한다.
